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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영화 동주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참회록

by 행복한뚜지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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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포스터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참회록

8년 전 이 남자는 삼촌 송몽규(박정민)와 함께였다. 그리고 히라누마 도쥬의 진짜 이름은 윤동주(강하늘)였다. 어릴 적부터 친형제처럼 자라난 두 사람은 글을 쓰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의기소침한 동주에게 송몽규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동주는 아버지에게 잡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실망의 호통을 내뱉는다. 아버지의 반대에 동주는 또다시 의기소침해진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에 동원될까 걱정해야 했던 시대였기에 몽규와 동주 또한 언제 군대에 끌려갈지 알 길이 없는 상황이다.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두 사람은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로 향한다. 여진(신윤주)은 동주가 꼭 만나고 싶어 하던 정지용 선생과 가까웠다. 여진의 도움으로 동주와 정지용(문성근) 선생과의 만남이 성사된다. 그 무렵 일제의 앞잡이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했고, 조선 이름 조선어 교육에 대한 핍박이 시작됐다. 동주는 창씨개명계를 찢어버린다. 결국 두 청년은 일본 교토로 향한다. 그리고 창씨개명을 받아들인다. 동주의 총명함은 어디서나 빛이 났고 릿쿄대학의 다카마쓰 교수의 눈에 동주가 들어온다. 다카마쓰 교수는 동주에게 용기를 준다. 문학의 힘을 이야기해 주었고 시를 다시 쓰게끔 만들었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은 '대동아공영권의 정신'을 깨우치게 만드는 도구에 불과했다. 동주는 다카마쓰 교수를 통해 알게 된 쿠미(최희서)의 도움을 받아서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향한다. 편입을 했지만 사실상의 도피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몽규를 만나게 된다. 몽규는 여전히 교토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있었다. 1943년 히라누마 도쥬(동주)와 소무라 무게이(송몽규)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다. 독립운동이라는 거대한 죄목을 달고 있는 동주와 몽규는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으며 정체 모를 주사와 고문에 시달리던 동주는 얼마 못 가 사망하고 만다. 향년 27세, 청춘의 죽음이었다. 시인 윤동주는 27세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6개월 뒤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을 이루게 된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그 시절의 참회록과 같은 영화였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행복한 동주

동주도 시집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서글픈 결말이지만 엔딩 크레디트에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동주와 몽규의 행복했던 청춘을 보여준다. 또한 엔딩 크레디트 OST는 '자화상'이라는 노래인데, 이 영화의 각본을 맡은 신연식 감독이 작사하고 동주를 연기한 강하늘 배우가 직접 불렀다. 가사는 윤동주 시인의 영혼이 젊은 시절 살았던 곳을 훑어보는 내용이다. 동주가 행복해 보이는 마지막 장면들은 정작 본편에는 하나도 안 나온다. 이는 아무리 슬픈 결말의 영화라도 비참하게 끝내지 않으려는 이준익 감독의 연출 의도가 담겨있다. 이것이 이준익 감독이 가지고 있는 따뜻한 인간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흑백 영화가 주는 감동

영화 동주는 화려하지 않은 단정한 느낌의 흑백 영화로 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학사모를 쓴 흑백 사진일 것이다. 그래서 이준익 감독도 아무래도 흑백 영화가 잘 어울릴 거라고 판단했을 것 같다. 또 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시를 쓰는 동주의 모습을 통해 그 시대가 그대로 박제되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표현했다. 흑백으로 표현한 것이 당시의 암울한 시기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흑백 영화가 주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 단순함이 주는 간결미가 있다. 영화 동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인물 중심의 영화이다. 화면을 흑백 처리하여 인물에게 집중하게 함으로써 배우들의 연기가 잘 드러나고 감정이 또렷하게 전달되는 효과가 있다. 동주와 몽규가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유학 가는 장면에서 바깥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이 마치 검정 먹물로 그려놓은 수묵 담채화 같았다. 이는 흑백 영화였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정서였다.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의 실제

윤동주 시인의 실제 성격은 영화 속에서 보이는 성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윤동주 시인은 취미가 재봉질이었을 만큼 섬세한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 송몽규는 한 번 결정하면 그 결정을 실천에 옮기는 시간이 짧았다. 송몽규 열사는 혁명가 기질을 타고났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면 소름 돋게 똑같다. 두 사람은 1917년 만주 명동촌의 윤동주 집에서 출생했다. 같은 해에 같은 곳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해에 같은 형무소에서 같이 죽는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으며, 송몽규 열사는 1945년 3월 7일 사망했다. 두 사람 모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젊은 청년이 버텨내기엔 일제의 폭압이 너무나 잔인했다. 교실에서 삭발을 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강하늘 배우가 데뷔 후 첫 삭발을 하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강하늘 배우의 남다른 열정이 빛난 장면이었다. 또한 윤동주 시인은 형무소에서 정체 모를 주사를 매일 맞았다고 전해진다. 이 주사에 대해서는 일본이 혈액 대체제를 만들기 위해 생체실험을 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동주에게 용기를 주었던 다카마쓰 교수는 실제로 학생들에게 쌀밥을 나누어주고 정작 본인은 굶어서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정지용 시인 역으로 문성근 배우가 특별출연했다. 이는 의미가 깊다. 문성근 배우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가 실제로 윤동주, 송몽규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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