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학생의 억울한 죽음
서울대 학생 박종철은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간첩도 아니고 참고인으로 잡아 온 대학생이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는 말은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에게까지 보고 되지만 보고를 들은 그의 반응이 너무 침착하다. 무고한 대학생의 죽음을 대하는 권력자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시대 상황을 간단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관례대로 처리하려던 대공수사처의 계획은 서울지검 공안부장인 최 검사(하정우)로부터 뭔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딱 봐도 별로 고분고분할 사람으로 안 보이는 최 검사는 끝까지 시신의 화장을 막는다. 정의감이 발동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최 검사 덕에 학생의 시신은 부검을 받게 된다. 애먼 곳에서 계획이 꼬이자 무려 치안 본부장이란 사람은 횡설수설하다가 얼떨결에 목격자가 있음을 말해 버렸고, 동아일보 윤상삼(이희준) 기자는 이걸 놓치지 않는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오연상 박사는 잠시 권총을 보고 겁을 먹는 듯했으나 재래식 화장실에서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한 윤상삼 기자에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시신의 부검을 집도했던 황적준 박사는 청와대 직속 돈봉투를 액수 한번 확인해보지 않고 단칼에 거절해 버린다. 이렇게 작성된 부검 확인서는 최 검사의 손에서 윤 기자의 손으로 넘어간다. 정부에서 내려온 보도지침 따위는 단호하게 무시해 버린 동아일보 사회부장(고창석)은 마침내 이 사건의 진상을 기사화한다. 대공수사처의 관례대로 처리하려던 계획이 물거품 된 것이다. 영화 1987의 전반부는 자칫하면 그냥 묻혀버릴 뻔했던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는지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릴레이 경주하듯이 바꿔 가면서 보여준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숨 가쁘게 달리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바로 이 인물, 연희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그제야 숨을 고르기 시작한다. 김태리 배우가 연기하는 연희는 감옥 안의 언론인과 바깥의 재야인사가 서로 펜팔을 할 수 있도록 비둘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영등포 교도소의 교도관인 한병용(유해진)의 조카이다. 한병용은 자신의 험한 외모 때문에 매번 검문에 걸리는 탓에 대신 정말 검문에 걸리기 어려울 것 같은 연희를 '최종병기 그녀'로 사용한다. 그녀는 이 영화가 만들어낸 유일한 가상 인물이자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대와 기를 쓰고 시위대를 잡으려는 백골단의 싸움 속에 그녀 역시 최루탄 냄새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최루탄만큼이나 매콤하게 각막을 강타한 첫사랑도 역시 피할 수 없었고 말이다. 배우의 얼굴이 때로는 그냥 개연성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연희는 그냥 잘생긴 얼굴에 혹해서 단숨에 머리에 붉은 띠를 묶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노동 운동에 투신했다가 정작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희생만 당했던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 모두가 속으로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만한 의문을 표현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영화 예고편에도 등장한 대사이다. 그러나 삼촌이 남영동에 끌려가버리고 나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진실을 자신의 손에 쥐게 된다. 마침내 그녀가 결심하고 진실을 알리자 절대로 손바닥으로는 가릴 수 없는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훌륭한 점 중 하나는 마치 절대악처럼 그려지는 대공수사처장 박처원 또한 대충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 사람 또한 깊은 상처를 가진 인간이었으며 스스로를 애국자라 굳게 믿으며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마지막 순간에 가장 비참하게 버림받고 만다. 아마도 누군가의 첫사랑, 누군가에겐 목숨보다 귀한 내 자식, 또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자 불의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가 소리치는 용감한 이들이 끝없이 희생당하는 이 시대를 고치기 위해서 말이다. 영화 1987은 그 시절 불의에 굴하지 않고 맞섰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가슴 터질 듯한 헌사이면서 지금의 세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개봉했던 2017년의 우리는 아마도 이 영화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사람들
남영동에서 서울대 학생이 죽었다는 걸 검사가 기자에게 흘리기 전에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라는 대사는 검찰 내부의 동의가 있었을 거라는 짐작을 표현한 대사이다. 그렇다고 국가안전기획부와 정면으로 맞설 순 없으니 기자들을 활용해 정보를 흘린다. 최초 검안의였던 오연상 교수의 증언인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말을 들은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가 '물고문'인 것을 특종 보도했다. 국과수 1세대인 황적준 박사가 정부의 압력을 물리치고 질식사로 명시한 부검 결과를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한 것이다. 박종철 열사의 경우 박종운이라는 선배의 행선지를 캐려고 고문을 한 것이다. 근데 정말 모르는 걸 물으면서 고문을 하면 대책이 없다.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으며 고문을 당할 때의 절망감을 생각하면 참 억장이 막힌다. 그리고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경우 보통은 최루탄은 보고 피할 수 있게 날아오기 때문에 이한열 열사가 그렇게 최루탄이 날아 오리라고는 상상을 못 했을 것이다. 원래는 45도 이상 기울어져 있어야 발사가 가능하다. 사람에게 쏘는 걸 막기 위한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법으로 방아쇠를 반쯤 당기고 내려서 쏘면 직격탄이 나가게 된다. 아마 이한열 열사에게 직접 총을 쏜 사람은 분명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전경들 또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입대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젊은이들끼리 정신 분열적으로 싸우게 만든 최고 권력자가 문제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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