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가족의 이야기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아내 모니카와 함께 미국에 온 제이콥은 10년간 병아리의 암수를 감별하며 모은 돈으로 아칸소주 시골 마을에 땅을 산다. 좀 더 큰 규모의 일로 돈을 벌어 가족에게 무언가를 이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모니카는 농장과 이동식 주택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반갑지만은 않지만 남편 제이콥을 믿기로 한다. 그러면서 밥벌이를 위해 병아리 감별사 일을 시작한다. 여기에 부부를 대신해 몸이 약한 막내아들 데이빗을 돌봐줄 외할머니 순자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온다. 가족들은 새로운 터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지만,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다. 제이콥의 자신감과는 달리 농장 일은 녹록지 않다. 모니카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지키며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마음만큼 잘 풀리지 않는 듯한 남편의 모습에 불안하다. 어린 데이빗은 고춧가루, 멸치, 한약 그리고 미나리 씨앗을 잔뜩 들고 온 한국 할머니 순자와의 동거가 영 어색하다. 영화 '미나리'는 이처럼 1980년대 아칸소로 이사 온 한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일까?
일단 이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는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이다. 알고 보니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감독은 실제로 이민 온 부모님 밑에서 자라며 아칸소의 한 시골 마을 농장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인이었던 부모님이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됐는지 딸에게 애써 설명하는 자신의 모습이 각본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한다. 연출을 맡은 정이삭 감독은 전작 '문유랑가보'로 칸 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차세대 명 감독이다. 여기에 '스티븐 연'이 출연과 함께 제작자로 참여해 '플랜B'에 시나리오를 추천하면서 영화의 제작이 가시화됐다. 이곳이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로 유명한 그 '플랜B'이다. 여타 할리우드 영화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출연자 대부분이 한국인 또는 한국계 미국인이며, 자막이 5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제작자인 '크리스티나 오'는 "대본을 읽으면서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영화는 처음"이라며 "농장에서 자라지도, 가족이 겪은 일을 경험한 적도 없지만 실제처럼 다가왔다"라고 제작을 결심한 이유를 설명했다.
영화는 쉽다. 별도의 정보나 배경지식 없이도 그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이 영화에서 자신과 가족의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동시에 깊다. 감정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현실 앞에 좌절하는 부부의 갈등부터, 핏줄이지만 말도 문화도 달라 벌어지는 할머니와 손자 사이 미묘한 어긋남까지 조화롭게 담겨있다. 무엇보다 영화 <미나리>의 저력은 보편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희망을 뿌리내린 한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민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삶을 살아내기 위해 혹은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희망을 건 모든 이를 향한 헌사처럼 느껴졌다. 그 삶이 밝지만은 않고 때론 벅찼더라도 서로 지탱하며 버텨왔기에 오늘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타이틀이기도 한 미나리가 작품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상징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의 탄탄한 시나리오를 입체적으로 살린 데에는 배우들의 역할이 크다. 개인적으로 한예리의 연기가 눈길을 끌었는데, 엄마, 딸, 아내 그리고 모니카 자기 자신까지 복합적인 면을 섬세한 연기로 구별해 표현해서 납득이 갔다. 데이빗 역할의 '앨런 김'은 윤여정과의 나이를 뛰어넘은 티키타카는 물론 표정만으로도 웃음 짓게 하는 연기로 존재감을 뽐낸다. 정이삭 감독은 '앨런 김'을 두고 "우리의 넋을 빼놓았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순자 역의 윤여정 배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손주들과 화투를 치고 익살맞은 농담을 건네는 순자는 데이빗의 말처럼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 동시에 몸이 약한 데이빗에게 '너는 스트롱 보이(Strong Boy)야' 반복해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낯선 땅에서도 뿌리내린 미나리처럼 가족이 단단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몸을 다해 지탱하는 순자 역을 윤여정은 탁월한 완급조절로 생동하게 했다. 같은 영화 내에서도 등장마다 완전히 다른 색과 느낌으로 영화를 풍성하게 채워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각각의 캐릭터가 개성 강하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는 점도 미덕이다. 개인적으로 배우들의 앙상블을 보며 영화 내내 가족을 따듯하게 비추는 자연광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윤여정부터 한예리까지 배우들은 로케이션 장소인 오클라호마 털사 지역에서 촬영 내내 합숙하며 지냈는데, 대화 중 상당수가 배우들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이 아버지에게 혼나면서 귀엽게 잔꾀를 부리는 장면이 있다. 그때 순자가 "네가 이겼다"라며 데이빗을 쓰다듬고 자리를 뜨는데, 이 장면의 대사와 애드리브를 윤여정 배우가 제안했다고 한다. "여우조연상은 모르겠지만 앙상블상은 탈 만하다"라는 윤여정 배우의 자신감에 과장은 없었다.
영화 속에서 윤여정 배우가 이런 대사를 한다. "미나리는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란단다. 누구나 뽑아 먹을 수 있어. 원더풀 미나리, 원더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뿌리내린 씨앗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나아갈 힘과 지혜를 준다는 점에서 영화 '미나리'가 주는 여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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