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코에게 사랑에 빠진 숙희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운포 최고의 장물아비가 아니라 장물 어미인 복순 씨가 운영하는 도둑 소굴, 보영당에 찾아온 후지와라 백작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이 사람은 후지와라 백작이 아니라 조선인 사기꾼 고판돌이다. 고판돌은 돈이 아주 많은 어느 아가씨를 하나 꼬드겨 그녀의 재산을 홀라당 털어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 댁에 하녀로 들어가서 자신과 쿵작을 맞춰줄 파트너를 구하러 이곳에 왔다. 그가 파트너로 낙점한 사람은 조선의 유명한 대도둑의 딸이자 보영당의 유망주인 남숙희였다. 어딘가 나사가 한두 개 빠져있던 듯한 히데코 아가씨의 순진함은 그녀의 모성애를 강하게 자극한다. 히데코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동정에서 연민으로 그리고 애정으로 거기서 한 스텝 더 나아가서 설렘으로 바뀐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반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아가씨가 고판돌에게 정말 사랑에 빠지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결국 히데코와 후지와라 백작은 계획대로 저택에서 도망 나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제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고 그녀의 재산을 나눠갖기만 하면 되는데 상황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다. 히데코가 아닌 숙희를 정신병원에 가둔 것이었다.
숙희에게 사랑에 빠진 히데코
영화의 2부는 바로 히데코의 이야기이다. 원래 일본인이던 그녀는 어린 시절 이모부이자 후견인인 코우즈키의 저택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모부라는 인물은 사실은 조선인인데 일본인을 동경해 몰락한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한 친일파에 온갖 음란 서적을 무슨 문화재라도 되는 양 모으는 악취미를 갖고 있다. 심지어 독서 모임을 연 다음 무려 자기의 아내에게 그 책을 낭독하게 하는 변태 중의 왕 변태였다. 집 밖에 나가본 적도 없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그녀가 음란 서적을 낭독할 때 보게 되는 남자들 뿐이었다. 그러니 성격이 좋을 리는 물론 없고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어느 날 이 집을 찾은 남자들 중 하나가 그녀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자신과 가짜로 결혼하면 변태 이모부의 손을 벗어나 자유의 몸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모든 계획은 다 히데코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녀를 구해 정신병원에 자기 대신 집어넣기로 하는 계획 말이다. 그 희생양으로 써먹기 위해 후지와라 백작이 고른 사람이 바로 남숙희였다. 하지만 숙희가 히데코에게 반했듯이 히데코 또한 숙희에게 반해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속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숙희는 일생의 꿈을 포기해 버릴 만큼 히데코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히데코 또한 자신의 모든 걸 버릴 수 있을 만큼 정말 숙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다시 히데코 대신 숙희가 정신병원에 가두어지는 장면으로 돌아와서, 물론 이건 당연하게도 백작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다. 당연히 숙희는 구출되고 한때 일확천금을 가진 듯한 행복에 잠깐 잠겼었던 백작은 다음 날 아침 두 명의 칼잡이 앞에서 잠을 깬다. 숙희와 히데코는 함께 해피엔딩을 맞는다. 남자든 여자든 보는 사람에게까지 짜릿함을 전해주는 유쾌 상쾌한 영화 '아가씨'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마법 같은 순간이 있는 영화
정서경 작가가 '아가씨' 극본을 쓰게 되었을 때는 둘째 아이까지 출산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며 이제 사랑이 뭔지 알 것 같다고 느낄 때였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아기로 삼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엄마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명대사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최애 장면으로 꼽는 유명한 장면인 숙희가 골무로 히데코의 이를 갈아주는 장면은 오감이 폭발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 담긴 장면이다. 조용한 방 안에서 숨소리와 물소리, 나직한 배우들의 목소리, 좋은 냄새가 나는 향료 그리고 꽃잎까지.. 감각들이 농축돼 있어서 관객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또한 그 장면에서 히데코가 숙희의 팔꿈치를 만지는데 아마도 이 장면이 둘의 관계가 시작되는 포인트였을 것이다. 또한 히데코는 크고 아름다운 침대에서 자고, 숙희는 좁고 어두운 다락방에서 자도록 하는 설정이 둘의 공간을 분리하면서 계급의 차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차이가 사랑의 장애물이 되지는 못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미닫이 문은 오히려 서로를 지켜보고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굉장히 훌륭한 멜로 드라마적 장치였다. '아가씨'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두 사람이 성별, 신분, 국적 등 모든 것을 뛰어 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있는 영화였다. 금기를 넘는 이야기마저도 보편성을 얻게 만드는 박찬욱 감독의 매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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